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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9일 목요일

국가를 설계해보자!


국가시스템 컨설팅에 있어서 필자가 갖고 있는 고민 하나는 공급과잉상태의 자영업 구조의 해소이다.


*문제의식
좌파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서 사회건설의 핵심은 노동자이다. 그런데 그런 서구로부터 유입된 이데올로기들은 한국적 특질에 정합하지 못한다. 대한민국 절반 이하만 노동자이고, 그 중 노조 조직율은 9%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어용노조가 절반이다. 즉, 조직력이 있는 노동자는 전국민의 3%미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실제로 2011년 민주노총 조합원수는 60만명에 약간 부족한 수준이었고, 인구수 4,500만명 대비 1.4%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적극적인 조합원은 과연 몇명이나 될까?) 따라서 조직된 노동자만으로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다. 마오쩌뚱의 공산당이 노동자 외에 농민도 당연한 혁명의 중심세력으로 세웠던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노동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조합원들이 강성 조합원이 되어달라는 건 지나친 요구라고 생각한다. 좀더 순화된 방식으로 변화를 추진할 수 있는 방법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행동에 동의할 수 있는 폭을 넓히고, 더 낮은 수준에서 더 많은 지지자와 참여자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혁명을 일으킬 것인지 말 것인지는 수단일뿐이므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설계해야 행복할 것이며, 그 공동체의 생활방식을 어떻게 구조화할 것인가이다. 그 과정에서 국가라는 통제기구가 사라질 것인지는 차후의 문제이다. 21세기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국가가 불필요해지는 시점은 요원하고, 지금의 국가통제시스템을 좀더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그런 지점에서 국가라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사회구조를 재구조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체로 노동자라는 고용형태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그 삶의 모습과 생활 수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국가설계의 중심세력
사회의 모습은 그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생산하고 그것을 분배하는가에 따라 구성되고, 권력의 배분도 그 제도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생산의 방식이 잘못되었을 경우, 그것에 기반한 국가 의사결정의 구조도 잘못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의 주축은 노동자와 농민, 자영업자이다. 중견기업과 대기업 경영진과 소유주들은 그 기반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국가 의사결정의 상당부분은 노동자와 농민, 자영업자가 갖고 있어야 하고, 그것이 국민주권의 민주주의이다.
그런데 지금 국가형태를 결정짓는 법과 제도는 대기업의 이권에 따라 좌지우지 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CEO가 대통령이 되어 국가를 팔아먹고 있다. 이것은 기층 경제구조에 대한 도전이며 위기를 불러오는 도화선이다. 따라서 국가를 설계하는 데에 있어서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이들이 자신들에게 적용될 제도에 대해 결정할 수 있도록, 민주적 경제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국가설계의 중심세력이 누구이고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를 검토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국가설계의 중심세력을 어디까지 보아야할까? 즉, 무산자 계급에 노동자 외에 어디까지 그 범위를 넓혀야 할 것인가? 공부가 짧은 나로서는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과연 노동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을까? 물론 노동자가 90%에 육박하는 유럽적 특질이라면 그것이 타당할 것이나, 한국적 특질에서는 노동자에 한정할 수 없다고 본다. 브르주아에게 착취당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일 수는 있어도, 프롤레타리아가 곧 노동자는 아니다. 즉, 사업 규모와 무관하게 사장님들을 모두 브르주아로 볼 수 없다는 이야기다. 영세자영업자도 따지고 보면 대기업 중심의 생산구조에서 경제적 종속성을 띤다. 특수고용직 노동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바로 이런 지점들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계급엔 노동자뿐만 아니라 영세자영업 사업주들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한국적 특질에서 노동자와 삶의 수준이 별차이가 없는 대다수 영세사업주들도 중요한 경제적사회구성체의 중심세력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농담이 있다. "퇴직하고 나면 치킨집이나 차려야 겠다" 기업에 고용되었던 노동자가 해고되거나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인생의 나머지 절반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영업을 할 수 밖에 없다. 즉, 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의 경제적 수준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고용형태에 천착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사회 생산구조 속에서 자신의 국가의 부를 창출하였지만 그에 정당한 대가를 부여받지 못한, 즉 착취당하는 계급에 노동자와 농민, 자영업자도 포함되므로, 개선된 사회구조 속에서는 노동자와 농민 외에 영세자영업자들도 사회경영의 의사결정에 의결권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세자영업자도 중요한 사회건설 중심세력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들도 사회건설을 위해 스스로 나설 수 있도록 조직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개별적으로 쪼개져 있어서는 안 되고 계급의식 속에서 연대하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그 연대에는 노동자, 농민, 영세자영업자가 아닌 무산자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시작은 생산구조의 혁신에 달려있다고 본다.


*생산구조의 혁신
영세자영업자가 안고 있는 모순은 바로 공급과잉이다. 사회의 정보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발전할 수록,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은 점점 줄어들고, 그만큼 고용의 유연성을 필요로 하게 된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건 이유가 있는 변화이다. 그렇게 안정적인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 줄어들 수록 안정적인 내수시장은 침체되어 가지만, 자영업자는 늘어간다. 즉, 자영업에서 공급과잉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안정적인 고용구조에 편입되지 못한 자영업자들의 생활고로 돌아온다. 이들 영세자영업자들의 공급과잉을 해소하여 생활소득을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세자영업의 업종선택과 생산구조를 개인에게 모든 것을 맡겨선 안 된다.
먼저 생산구조는, 노동자가 되려는 자에게는 노동법의 최소기준이 적용된다면, 영세자영업자에게도 그에 준하는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 규제 규모는 반드시 국가단위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도단위 혹은 시단위라도 좋다.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하다 못해 조례로라도 근거를 마련하고 예산을 배정할 수 있으면 된다. 업종의 개체수와 규모의 관리, 고용형태와 예산규모의 관리, 보험정책을 활용한 사업주의 사업도산의 방지 및 회생수단 마련 등이 그것일게다. 어쨌든 국가독재하의 통제경제가 아니라면 국가가 일일이 참견하고 통제할 수는 없다. 결국 개인의 삶은 개인이 책임져야 하고, 그 대가로 자유를 누린다. 국가가 해야하고 할 수 있는 영역은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이다. 자영업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 지역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업종에는 무엇이 있고, 국가가 지원해주는 창립지원의 내용과 요건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공급과잉 저지선을 형성함과 동시에 자립까지 기초자본을 만들어줘야 한다. 이것의 장점은 기초경제의 안정적인 형성과 동시에 영세사업장에 고용된 근로자들의 안정적인 보호이다.
이렇게 생산구조에 대해 국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업종을 관리할 수 있게 되는데, 이로써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난립이나 지역성이 배제된 평준화된 시장형성, 인위적인 국책관광사업이 방지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해본다. 예를 들어 농업인구가 많은 지역에서는 반드시 도시화가 필요하진 않을게다. 꼭 대형할인마트가 없어도 될 것이다. 오히려 5일장같은 제래시장이 적절할 수도 있다. 또한 그 지역에 특성화된 업종관리를 하게 되면 농촌지역적 특성이 유지될 수 있으므로, 인위적으로 대운하 건설을 한다거나 하는 뻘짓을 하지 않더라도 관광 컨텐츠가 만들어진다. 외국인들이 멀리 비행기를 타고 와서 쎄멘 발라진 강을 보겠다고 비싼 돈을 들여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그 지형적 특질이 살아있는 지역경제시스템이 만들어낸 마을의 풍경이 더 보고 싶을 것이다. 국가는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다.


*사회적 기업에 대한 고민
영세자영업 혁신의 방법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나, 결국 삶의 영역이 일정 범위의 지역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하나의 지역을 단위로 설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몬드라곤처럼 일련의 생태를 건설하여 성공적으로 적용된 케이스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라면 사회적 기업도 좋은 모델이 되지 않을까?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을 제외한 대다수 영세자영업에 대한 관리와 안정화의 수단으로 사회적 기업의 제도화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어차피 한국의 경제발전 수준은 인위적인 고용창출은 점점 어려워진다. 오히려 그런 노력이 비정규직이나 저급한 일자리를 대량창출하게 될 것이다. 비싼 임금의 적은 일자리가 경향이라면, 그리고 외국의 저렴한 근로자 도입이나 국내 생산업체들의 외국이주가 경향이라면, 그것의 인위적인 조정 외에 어느정도 순응할 수 있는 안정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자리가 줄어든다>노동자가 자영업자가 된다>자영업자가 도산한다>취약계층이 된다>비정규직이 된다>골로간다' 노동자가 아닌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제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두가 노동자가 될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모두가 대기업 경영자가 될 수 없다면, 중소자영업으로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경제적 기여가 사회에서 유의미해야 한다. 지금처럼 대기업 프렌차이즈 난립으로 소모되어선 안 된다. 물론 그 자리에 '맥도널드'가 생긴 이유는 있을 것이다. 수요가 있으니 창립하도록 지원할 것이다. 하지만 한 집 건너 한 집씩 통신사 대리점이 난립하는 건, 한국인들이 소통에 대한 대단한 열망이 높은 수요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들은 안정적인 수입원으로 선택할 수 있는 업종이 몇 없었던 것 아닐까? 그리고 그런 창업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무엇일까?
상품의 개발과 유통은 대기업과 중견기업들로 충분하다고 본다. 오히려 그들 영역은 그들의 것으로 남겨둬야 직접고용에 의한 직영점이 늘어나지 않을까? 지역에서 필요한 서비스 및 유통 생산은 대규모가 아니어도, 소규모로도 충분할 수도 있다. 그것을 지원해야 한다. 그런 소규모 사업장들을 건강하게 육성해야 기초경제가 튼튼하게 건설될 수 있다. 사회적 기업 정책은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즉, 자영업의 공급과잉 해소와 안정적 유지의 수단으로 사회적 기업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해본다.


*사회적 기업에 대한 단상
사회적 기업에 대해 소위 보수세력에서도 적극 찬성한다. 이유는 국가에 의한 복지 기능을 민영화함으로 인해서, 작은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논리는 다소 다르지만,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소위 좌파라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건, 우파들이 공격의 빌미로 사용하는 소련등의 몰락을 불편해 하면서도 국가에 의한 복지기능을 강변한다는 점이다. 즉, 국가주도하에 통제경제를 했던 것을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덧칠했고, 그것이 실패했는데 그런 실패한 사례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에서 다시 국가에 기대려 하는 건 웃기는 것 아닌가? 결국 국가의 통제시스템이 불필요해져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국가라는 통제시스템에 의존하지 않는 시스템을 구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립경제체제가 있어야 독점권력을 타도할 수 있다. 국가가 먹여살리는 경제체제는 국가가 권력을 독점한다. 관료조직에 아무리 민주적 보완책을 덧댄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본질은 결국 권력독점적인 관료조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앙통제방식(대기업 혹은 정부)의 경제로부터 벗어난 지역단위 자립경제체제를 건설하는 발판으로 사회적 기업이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 제도를 잘못 설계했을 경우엔, 사회적 기업 전체가 국가의 지원에 무조건적인 의존하는 형태로 안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기층 경제구조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허용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통제된 경제는 반드시 몰락한다. 자율과 통제의 균형감각이 필요한 부분이다.


*사회적 기업을 통한 국가건설
국가경제는 크게 대기업 그리고 그로부터 하청을 받는 중견기업, 그 밑에 소규모 사업장과 영세사업장으로 구성된다. 경제규모로 따진다면 대기업이 가장 거대하겠지만, 인구수로 따진다면 오히려 수규모 사업장과 영세사업장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이다. 따라서 생산과 소비의 생태구조의 중요한 근간이 되는 기층 경제구조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은 중요하고, 그것의 컨텐츠 자체도 사회 공동체에 유의미한 것이 되도록 설계한다면, 국가 전반의 경제생태가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서 수용하지 못한 실업인력은 사회적 기업에서 소화해내고, 그 수익을 사회공동체를 위해 함께 사용할 수 있다면 국가의 간섭 없이도 자생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대기업에 목매는 대학생들도 줄어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12년간의 성장기를 명문대학만 바라보고 경쟁만을 학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교육의 본질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교육의 본질에 대해 다시 고민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삶에 대해 다시 정립하게 된다는 것이고, 물질보다 인간의 삶이 더 중요하게 여기는 국가라면 적어도 지금보다 더 살만한 세상일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자영업자들이 만드는 사회적 기업은 단순한 돈벌이 외에 공동체의 공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은 사회구조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대기업이나 유력정치인이 아니라 자신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각성하게 하지 않을까? 서로 공존해야 한다는 생존 조건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그런 것들이 절실한 연대의식을 형성시키게 되면, 혁명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들의 민주주의를 우리의 민주주의로 재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국가건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주인이 주인의식을 깨닫고 연대하는 그 순간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


*논의의 발전 방향
국가를 컨설팅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부분이다. 따라서 정책이나 제도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완성할 수 없고, 매우 다양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맞아떨어질 수 있어야 오류가 발생하지 않고 선순환 할 수 있다. 앞으로 하나의 철학적 기조 아래에 그에 부합하는 제도들로 실현가능한 체제들로 구성된 국가를 설계해 나갈 수 있도록 고민하고 논의해 나가도록 하겠다.
특히, 이 글에서는 사회적 기업에 대해 맹신하는 것처럼 적었지만, 아직 사회적 기업의 실체에 대해 잘 모르고, 그것을 예로 든 것뿐이다. 그것이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무엇보다 관심이 있는 것은 자립적이고 민주적인 경제구조의 설계와 그것을 토대로산 민주적 정치제도이다. 향후에는 우리사주제도나 경영참가제도, 사회기술시스템 등 민주적 생산방식에 대해 고민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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